문화
금빛 옻칠에 스민 시간, 홍성용 '박제된 기억' 전시
기사입력 2026-07-24 13:43
시간의 흐름 속에 희미해져 가는 기억의 파편들을 옻칠이라는 독특한 매질로 붙잡아둔 전시가 열려 눈길을 끈다. 서울 중구 금산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홍성용의 개인전 '박제된 기억'은 잊혀가는 과거의 감각을 캔버스 위에 고정하려는 작가의 집요한 탐구를 보여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아이와 얼룩말, 낡은 축음기와 화려한 샹들리에 등 도저히 한 공간에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이미지들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들은 일관된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 마치 꿈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기억의 조각들처럼 화면 곳곳에 흩어져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홍성용 작가에게 '박제'라는 행위는 단순히 과거를 박물관의 유물처럼 박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라져가는 찰나의 감각을 현재라는 시간 속으로 다시 불러내어 생명력을 불어넣는 창조적 작업에 가깝다. 작가는 옻을 칠하고 말리는 고단하고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기억이 층층이 쌓이고 변형되는 시간의 궤적을 형상화했다. 금빛과 갈색이 감도는 화면의 표면은 오랜 세월을 견뎌온 골동품처럼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 위에 새겨진 도상들은 평면 회화 그 이상의 물질성을 획득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44점의 회화 작품들은 작가 개인의 경험과 특정 장소에 얽힌 감정들을 하나의 평면 위에 중첩해 놓은 결과물이다. 옻칠 회화 특유의 깊이 있는 광택은 기억의 불투명함과 선명함을 동시에 드러내며 관람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화면 속 소재들은 서로 다른 연대에서 온 듯 이질적이지만, 옻칠이라는 공통된 질감 안에서 하나의 정서를 공유한다. 이는 파편화된 기억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의 커다란 감정의 덩어리로 뭉쳐지는 인간의 심리 구조와 닮아 있다.
작업의 핵심인 옻칠 기법은 기다림의 미학을 필요로 한다. 습도와 온도가 맞아야만 굳는 옻의 특성상, 작가는 자신의 의도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재료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이러한 제작 방식은 우리가 기억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는 사실과도 맞닿아 있다. 겹겹이 쌓인 옻칠의 층위는 망각의 늪에서 건져 올린 소중한 순간들을 보호하는 단단한 외피가 되어, 관람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박제된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 보게 만든다.

금산갤러리 관계자는 이번 전시가 전통 공예 재료로만 여겨졌던 옻칠이 현대 미술의 언어로서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많은 관람객이 작품 표면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질감과 그 속에 담긴 서정적인 도상의 조화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홍성용의 옻칠 회화는 디지털 시대의 가벼운 이미지 소비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물질이 주는 위로와 사색의 시간을 제공하며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전시는 광복절인 8월 15일까지 이어지며, 기억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홍성용 작가의 세계관을 온전히 만끽할 기회를 제공한다. 44점의 작품이 뿜어내는 옻칠의 향과 색은 관람객 각자의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낡은 사진첩을 들춰보게 할 것이다. 작가가 캔버스 위에 정성껏 박제해둔 기억의 흔적들은 이제 관람객의 시선과 만나 새로운 기억으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마쳤다. 한여름의 열기 속에서 만나는 서늘하고도 깊은 옻칠의 세계는 8월 중순까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관람객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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